친구들... 나 여기로 이사왔어. 다들 잘 알 있겠지만 여긴 아무나 올 수 없는 곳이야. 

갑작스런 너무나 갑작스런 자전거 사고로 중환자실에서 1주을 지낸 후에 하늘 나라로 떠나왔어. 세상에서 이 작별을 가장 힘들어 하는 엄마, 그리고 아빠와 형... 할머니와 고모, 삼촌, 이모부를 비롯한 사촌들과 가족들, 외삼촌과 외가 사촌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함께 다녔던 많은 친구, 자전거 국토순례 지도자들과 선배, 후배들이 짧은 장례 기간 동안 저를 배웅하러 와 주었어. 도욱이를 비롯한 몇몇 친구들은 장례식장에서 함께 밤을 보내주고, 자기들 보다 무거운 나를 창원상복공원 화장장까지 잘 데려다 줘 정말 고마워.

사고와 장례 소식을 미처 듣지 못해서 나중에 카톡을 보내와서 미안하다고 인사를 전한 친구도 있었어. 그중에도 초등학교 친구 상운이는 꼭 나를 배웅하러 올거라고 엄마가 많이 기다렸던 친구였어. 사실 엄마도 내가 상운이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장례를 치르는 동안 상운이를 기다렸어.

나중에 상운이 한테 연락이 왔는데.... 장례 기간 동안 연락을 못 받았다 카톡이 왔었어. 내가 떠난 후에 온 상운이 카톡을 보니 소식을 늦게 들었다고...어디에 있는 지 알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다행히 내 폰은 살아 있고, 엄마가 대신 답장을 해줬어.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영혼과 육신은 가는 곳이 달라. 나는 평소 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았지만, 내가 삼성병원 중환자실에서 힘겹게 버티는 동안 우여곡절 끝에 세례를 받았고, '라파엘'이라는 본명을 갖게 되었잖아. 이 라파엘은 엄마, 아빠의 간절한 소망대로 빛을 따라 하늘나라로 왔어. 

하지만, 제 육신은 여러 분도 아시는 것처럼 창원상복공원 화장장에서 한 줌 '재'가 되었고, 창원상복공원 제 2봉안당에 안치되었어요. 엄마, 아빠를 두고 이사를 온 걸까요? 분가를 했다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저는 이십 사년 동안 너무도 살뜰하게 돌봐주시던 엄마와 약간 차 갑고 무뚝뚝하지만 결국 다 챙겨주는 아빠 곁을 떠나 홀로 여기 와서 낯선 어른들과 함께 지내고 있지요. 

엄마, 아빠가 정말 좋아했던 후배 류창현 이사님이 옆방에 계셔서 든든하긴 하지만 좀 외롭고 심심하네요. 엄마, 아빠는 삼우 때 저를 보러 와서 류창현 이사님에게 "우리 아들 잘 부탁한다"고 이야기 하시더군요. 이 낯선 곳에서 제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여기 상복공원 납골당 말고 하늘 나라에서는 저를 무지무지하게 사랑했던 할아버지께서 왜 벌써 왔냐고 나무라시긴 했지만, 제가 어렸을 때 처럼 다시 돌봐주고 계십니다. 엄마, 아빠가 모두 일 때문에 바쁜 날 할아버지와 함께 자는 일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 때 마다 할아버지는 두꺼운 손으로 제가 잠들 때까지 등을 쓰다듬어 주시곤 하였습니다. 

여기 주소는 창원상복공원 제 2봉안당 1층 4안치실 023호야~ 참 낯선 주소지?

아 제 주소를 알려드릴께요. 저는 창원상복공원 제 2봉안당 1층 제 4 안치실 023번입니다. 엄마는 입구 자리에 아랫 쪽이라고 아쉬워 하였습니다만, 제 자리는 창밖을 정면으로 볼 수 있고 빛이 많이 드는 자리입니다. 더군다나 정면으로 직선거리 8.5km 되는 곳에 바로 우리 집이 있습니다.

고개 만 들면 늘 하늘과 나무들을 바라 볼 수 있고 그 보다 더 멀리에는 엄마, 아빠가 사는 우리 집이 있으니 아주 아주 괜찮은 자리입니다. 아마도 엄마는 미처 이 생각을 못하였을 겁니다. 

특히 지금은 코로나 19 때문에 봉안당 입실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엄마, 아빠는 매 주말마더 저를 보러 오는데, 다행히 제 자리는 창문 밖에서도 정면으로 마주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지난 주에도 지지난 주에도 엄마, 아빠는 창문 밖에서서 먼 발치로 저를 보고 같습니다. 엄마는 가까이서 저를 못 보고 가는 것도 안타까워 하였고, 준비해 온 꽃을 그냥 집으로 들고 가야 하는 것도 아쉬워하셨습니다. 

지난 30일 날은 저희 집에 사진 문패가 달렸습니다. 엄마는 이 작은 변화도 너무 고마워하고 감사해 하셨습니다. 저를 보러 올 때마다 항아리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이 쓸쓸했는데, 제 사진 문패가 놓여 있으니 "그나마 이제 아들 보고 가는 것 같다."고 다행스러워 하였습니다. 

엄마 아빠가 오후 4시가 조금 넘어 저를 보러 왔는데 코로나로 봉안당 출입은 금지되었고 하필 그날 봉안당에는 전등이 모두 꺼져 있었습니다. 오후 4시가 조금 넘었지만, 잠시 후에 집중호우가 쏟아지기 직전이라서 하늘이 캄캄하였지요. 아마도 코로나19로 면회 금지 기간이라서 방문객이 없다고 관리소에서는 전등을 모두 꺼두었던 것 같아요.

다행히 제가 있는 방(4호실)에는 전등이 켜져 있어서 창 밖에 있는 엄마, 아빠와 인사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엄마는 이런 사소한 일도 정말 다행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엄마는 저를 보러 올 때마다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리는데...이 날은 창 밖에서라도 저를 보고 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시더군요. 

이 곳에 가족이나 친척들이 있는 분들, 장례식장이나 화장장에 오늘 일이 있는 분들은 잠깐씩 들러주세요. 아빠가 저를 여기에서 지내도록 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답니다. 아무 때라도 보고 싶을 때 보러 갈 수 있는 곳이라고 말이지요. 차가 막히지 않으면 저희 집에서 15분...직선거리 8.5km인데 엄마, 아빠는 저를 보러 올 수 있어도 저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먼 길입니다. 

 

※ 스물 네살, 짧은 생을 살다 떠난 저를 위해 제 아빠가 쓰는 이건호 이야기입니다. 

Posted by 이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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