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2월 31일에 태어 난 나는 하루 밤 자고 두 살이 되었어. 
그렇지만 돌 잔치는 만 1년이 지나고 1998년 12월 31일에 하는게 당연하잖아. 

돌 잔치는 집에서 했어. 그땐 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내 돌 잔치 때는 나 보다 세 살 많은 형이 더 좋아했던 것 같아.
외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돌 잔치 한 복을 형과 내가 똑같이 맞춰 입고 집(교방 주공아파트)에서 돌 잔치를 했어. 과일 같은 걸 상에 잔뜩 올려놓고 사진을 찍었어.


그때도 돌 잡이를 했었는데, 엄마, 아빠의 의도대로 '실 타래'를 잡았던 것 같아. 내가 돌이 되기 전에 죽을 고비를 넘겼기 때문에 모두들 장수를 상징하는 '실 타래'를 잡기를 바랬던 것 같아. 하지만 그런 부모님의 바람대로 되지 않아서 너무 미안하고 속상해.

첫 돌 무렵에 당시 마산YMCA가 있던 양덕 1동에 있는 '양덕 사진관'에서 돌 사진을 찍었어. 덩치가 산 만해진 청소년기부터 나를 만난 친구들은 잘 믿어지지 않겠지만 어린 시절 나는 돌 사진 모델이었어. 이 사진관에서 돌 사진을 찍고나서 한 달 쯤 후에 사진관 사장님이 내 돌 사진을 브로마이드(A1) 수준으로 확대해서 전시해둔거야. 

그 땐 지금과 달리 양복점이나 사진관 같은 곳에는 좀 촌스러운 '전시 부스'가 있었어. 길 가는 사람들이 모두 디스플레이 된 옷이나 사진을 볼 수 있도록 바깥을 향해 전시가 되어 있었지. 내 사진은 디지털 카메라가 널리 보급되어 양덕 사진관이 폐업 할 때까지 전시되어 있었어. 

할아버지, 할머니와 고모를 비롯해 우리 가족들은 일부러 그 사진을 보러 양덕 사진관을 갔었어. 그땐 마산YMCA 실무자들이 자주 가는 식당이 사진관 근처에 있었는데... 모두들 지나가면서 내 사진을 보고 한 마디씩 칭찬을 해줬어.

"건호 정말 귀엽게 생겼다고"

바로 이 사진이 양덕 사진관에 전시되어 있던 사진이야. 어찌보면 내가 사진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첫 돌 무렵부터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스물 두살 무렵에 나도 사진 촬영 감독이 되어서 1년 동안 참 많은 사람들의 가족 사진과 리마인드웨딩 사진을 찍어줬었거든. 

지금 우리집 거실에 걸려 있는 가족 사진들도 그 때 CH스튜디오에 근무할 때 찍은 사진이고, 사실 가족, 친구들과 작별할 때 그 영정 사진도 그때 찍은 사진에서 잘라냈거든. 

내가 사진 촬영 감독으로 삶을 꿈꾸게 된 사연을 나중에 따라 말해드릴께요. 아무튼 여러 분이 상상하시는 것보다 어린시절 저는 훨씬 귀여웠답니다. 아빠는 '하얀 달마시안 모자'를 쓴 제 사진이 가장 귀엽게 나왔다고 하지요. 

 

사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태봉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방송부원이 되면서 부터였어. 태봉고에는 내가 좋아하는 윤이 형이 두 명 있었어. 어릴 때부터 같은 체육관에서 태권도를 배우고 YMCA 캠프도 많이 같이 다녔던 윤이 형과 YMCA 이사님 아들 윤이 형인데... 둘 다 방송부의 리더였고...내가 닮고 싶은 형들이었어.(뜻대로 잘 안 되기는 했지만...)

아무튼 태봉고에 다니면서 방송부원으로 학교 행사 때 이런저런 촬영을 하게 되었고, 2학 년 때는 마을 어른신 '장수 사진 촬영 프로젝트'에 참가했어. 그 무렵부터 YMCA 청소년 자전거 국토순례에서도 사진과 영상 편집을 하게 되었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부산에 있는 대학 한 군데와 구미에 있는 대학 한 군데에 원서를 넣었는데, 구미에 있는 대학에만 합력했어. 엄마, 아빠와 함께 구미에 있는 그 대학을 보러 직접 갔었는데 기대보다 너무 교육환경이 열악해서 좀 더 준비를 하고 군대 갔다와서 다시 내가 원했던 대학을 들어가기로 했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잠깐 전문 작가에게 수업을 받기도 했어. 이름을 말하면 다 알 수 있는 송 작가님이야. 태봉고 다닐 때부터 작가님과 인연이 있었는데, 고등학교 졸업 후에 몇 달간 집중해서 공부를 좀 했지. 그 덕분에 돈은 안 되는 자원봉사 요청은 많이 받았어. 가장 대표적인 곳이 마산YMCA였지. ㅋㅋ 

아기스포츠단 캠프와 운동회, 가족의 밤을 비롯한 크고 작은 행사 때마다 요청을 받았고, 원탁토론, 자전거 국토순례, 마산YMCA 회관 개관식을 비롯한 큰 행사들도 촬영을 했었지. 큰 행사 때는 혼자 한 건 아니고 쉼표 성진샘, 그리고 스승이신 송 작가님 같은 분들과 함께 했지만.

아 그러고 보니 필리핀에서 6개월을 지내는 동안에도 사진 공부를 좀 하고 왔네요. 

하지만, 진짜 사진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된 건 CH스튜디오에 입사하면서부터야. 창원 상남동에 있던 스튜디오가 지금은 없어졌지만 여기서 근무하면서 사진을 많이 찍고 동호회에도 나가고 하면서 '실전 공부'를 많이 하게 되었어. 아빠보다 사진을 더 잘 찍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 스물 네살, 짧은 생을 살다 떠난 저를 위해 제 아빠가 쓰는 이건호 이야기입니다. 

Posted by 이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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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그룹 GOD가 처음 불렀던 '길'입니다. 
특히 비긴어게인에서 불렀던 '길'을 좋아합니다. TV 시청보다는 컴퓨터 게임을 좋아합니다만, 비긴어게인은 '본방사수'를 하려고 했고, 엄마가 그 사실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사고를 당하고 병원 응급실과 중환자실에 누워서 일주일을 보내는 동안 엄마, 아빠, 형은 여러 차례 유튜브를 찾아서 비긴어게인에 나오는 '길'을 틀어주었습니다. 서울에서 내려와 병원 3층 복도를 엄마, 아빠와 함께 지킬 때, 15분 짧은 면회시간에 형은 울먹이면서 제 귀에 대고 '길'을 불러주었습니다. 

아빠는 사실 이번 사고가 아니었으면 제가 '길'이란 노래를 가장 좋아한다는 사실을 몰랐을지도 모릅니다. 음치인 아빠는 노래를 부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듣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노래를 유난히 좋아했던 것은 노래 가사에 나오듯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지금까지 내내 '내 길'을 찾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저 처럼 자신의 길을 찾아 고민하고 방황하는 청년들에게는 아주 많이 공감되는 노래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사람들은 길이 다 정해져 있는지 아니면 자기가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또 걸어가고 있네
나는 왜 이길에 서 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무엇이 내게 정말 기쁨을 주는지 돈인지 명옌지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인지
알고 싶지만 알고 싶지만 알고 싶지만 아직도 답을 내릴 수 없네
자신있게 나의 길이라고 말하고 싶고 그렇게 믿고
돌아보지 않고 후회도 하지 않고
걷고 싶지만 걷고 싶지만 걷고 싶지만
아직도 나는 자신이 없네
나는 왜 이길에 서 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그건 누굴 위한 꿈일까
그 꿈을 이루면 난 웃을 수 있을까
오 지금 내가
어디로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살아야만 하는가
나는 왜 이길에 서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길에 끝에서 내꿈은 이뤄질까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그건 누굴위한 꿈인가
그꿈을 이루면 난 웃을 수 있을까?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이 노래 가사처럼 저도 제가 가는 길이 어딘지 알 수 없었지만 열심히 걸었습니다. 

엄마, 아빠는 길을 찾는 제 걸음이 느리다며 자주 재촉하였지만, 저는 "이게 정말 나의 길"인지 모르는 불안감을 안고 서 "그곳이 어딘지 알 수 없"는 길을 걸었습니다. "이게 정말 나의 길"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빠나 엄마의 기대만큼 빠르게 걷지는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걸음을 멈춘 적은 없습니다. 

내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만...

엄마, 아빠는 제가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였습니다. 아빠는 다양한 경험을 쌓게 해주려고 이런 저런 노력을 많이 하였습니다. 여덟 차례 참여한 자전거 국토순례, 백두산 자전거 여행, 지리산 등반, 발리 여행, 태국 여행, 일본 여행, 필리핀 꿈꾸는 청년 봉사단 활동 그리고 제가 혼자서 다녀온 제주도 라이딩 같은 것은 모두 엄마, 아빠가 제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경험 쌓기였답니다. 

하지만, 제 마음 속에는 '두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체험을 하면서도 좀 처럼 배움이 쉽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청년이 되었을 때는 그때 왜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남곤하였답니다. 

제가 하늘나라로 떠날 때, 엄마, 아빠가 가장 후회한 것은 그냥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다 할 수 있게 했어야 하는데 왜 못하게 막았을까 하는 후회였습니다. 서울에 놀러 갈 수 있게...용돈도 더 넉넉히 쓸 수 있게...갖고 싶은 것 가질 수 있게 못해준 것을 많이 후회하였습니다만,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엄마, 아빠 그리고 세상 누구도 심지어 저 자신 조차도 제가 이렇게 훌쩍 하늘나라로 이사하게 될 줄을 몰랐다는 것을. 

엄마, 아빠가 안 된다고 한 것들은 대부분 제가 더 상처 받고 주눅들까봐 못하게 한 것들이고, 넉넉한 용돈을 주지 않은 것은 제 미래를 준비하는 종잣돈을 만들어주시려고 그랬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엄마에게 후회할 실 일이 아니라고 말해드리고 싶습니다.

스물 네살 짧았던 세상 여행에서 가장 아쉬운 것은 노래말의 끝 구절처럼 제 길의 끝까지 걸어가보지 못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엄마, 아빠는 하루 15분 짧은 면회를 들어오면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제가 응급실에서 하루 밤을 보낼 때도 엄마는 저에게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제가 아기 때 저를 안고 불렀던 노래들입니다.  '섬집 아기'와 "은자동아 금자동아'를 불러주며 엄마, 아빠는 많이 울었습니다. 

형과 제가 태어났을 때 모두 출산 휴가만 마치고 일터로 갔던 엄마는 미안한 마음이 담긴 '섬집 아기'라는 노래를 참 많이 불러주었습니다.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갈 때,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 배고 스르르러 잠이 듭니다." 하는 이 구절에 특히 마음이 많이 갔던 모양입니다. 저를 두고 매일 아침 일터로 나가는 모습이 많이 닮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아빠가 이 노래를 따라 부르며 여러 번 눈물을 흘리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미 들을 수도 없고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많이 다녔지만 엄마, 아빠의 노래 소리를 귀가 아니어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제 가슴에 얼굴을 묻고 불러주는 엄마의 노래를 온 몸으로 듣고 또 들었습니다. 

 

※ 스물 네살, 짧은 생을 살다 떠난 저를 위해 제 아빠가 쓰는 이건호 이야기입니다. 

Posted by 이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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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나래란??

     그린나래는 `그린 듯이 날개를 펼치다'라는 뜻을 가진 우리말 입니다. 그린나래는 학교홍보와 신입생들을 위한 학교 체험을 목적이며 학생중심으로 진행되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입니다.

     값이 많이 나가는 카메라 같은 고가[高價]의 물건은 들고 오지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사진이 없어 읽기 불편하시더라도 끝까지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저희는 점심을 저희끼리 만들어 먹어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팀을 3팀으로 나눠서 각각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저희 팀은 여자애들의 선택으로 어묵탕을 먹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어묵탕을 만들었습니다. 어묵탕을 만들기 전에 물 끓이는 동안 어묵을 꼬지에 꽂았습니다. 아.... 생각보다 꽂아야 하는 거 정말 힘들더군요. 어묵꼬지를 다 꽂아놓고 여자애들이 육수 내는 동안 저희는 커피믹스를 발견하고 커피를 타서 마셨습니다.

     마시는 동안 여자애들이 육수를 만들고 간을 하지 않고 그냥 어묵을 투입했습니다. 저희야 당연히 다른 조로 가서 고기 굽 길래 그거 얻어서 머고 주먹밥 받아먹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돌아왔을 때 그때 어묵맛 스프를 3~4개를 넣고 간이 안 맞아서 음식 만들기를 주체하는 형을 불렀고 이 형이 소금 말고 간장을 넣으라 하였고, 그냥 간장을 들이부었습니다. 그렇게 저의 입에는 좀 짰지만 다른 애들은 입에 맞았던 거 같았습니다. 어묵도 맛을 보라하였고, 저를 제외한 남자애들은 맛을 보았습니다. 저는 별로 먹고 싶지 않았는데 애들에게 떠밀려서 결국 먹게 되었고, 먹었을 때 국물에 비해서 어묵은 괜찮았습니다. 

     앞에서 여자애들이 맛있냐고 해서 맛있다고 괜찮다고 말해줬습니다. 저희가 어묵탕을 2개를 했습니다. 이때 아까 도와주셨던 형이 와서 저희가 맛을 본 쪽이 더 맛있다고 했고, 저희 쪽에 있던 여자애들은 기뻐하더라고요.

     뒤에는 남자애들이 그릇을 들고 가면 여자애들이 퍼주는 식이였고, 점점 음식들이 한곳에 모여서 다 같이 먹기 시작했습니다. 몇몇은 설거지를 한다고 먹지 못한 애들도 있었으나 저는 제가 알고 지내던 형의 옆에 가서 같이 먹었습니다. 먹고 배부를 정도는 못 되었으나 그래도 맛있게 먹어서 좋았었습니다.

     친구들끼리 만들어 먹어보는 것은 거의 처음이 였고, 솔직히 만든다고 해도 초등학교 때 만들어 먹었는데 그때보단 지금이 더 재미있고 맛도 훨씬 괜찮았던 거 갔습니다. 고등학교 들어가면 요리부, 방송부 등에는 꼭 들어가고 싶습니다.

Posted by 감성사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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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나래란??


 

    그린나래는 `그린 듯이 날개를 펼치다'라는 뜻을 가진 우리말 입니다. 그린나래는 학교홍보와 신입생들을 위한 학교 체험을 목적이며 학생중심으로 진행되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입니다.

     값이 많이 나가는 카메라 같은 고가[高價]의 물건은 들고 오지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사진이 없어 읽기 불편하시더라도 끝까지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올해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됩니다. 저는 경남에 위치하고 있는 태봉고등학교에 진학을 하기 로 결정하였고 태봉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 면접 준비를 하였고 후에는 면접을 본 후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합격을 한 후 태봉고등학교에서는 신입생들을 위하여 2,3학년 올라가는 선배들이 그린나래 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소개하고 어떤 수업들이 있는지 알려주며 체험을 시켜주었습니다.
저는 태봉고등학교에 아는 형도 있고 해서 그린나래에 당연히 가게 되었고 가기 전 에는 많이 기대가 되었습니다.

     저는 학교에 갈 때 당연히 부모님이 태워주신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날 아빠가 바쁘셔서 저 혼자 시내버스를 타고 가게 되었습니다. 갈 때는 음악을 들으며 갔는데 알고 보니 1시간 가까이 걸렸습니다.

     갔을 때 면접을 같이 보았던 여자애도 있었고 남자애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자애한테는 인사를 못했고 남자애랑은 같이 어울려 있으면서 선배들이 주는 이름표도 받았습니다. 이야기 하고 있을 때 저가 알고 지내던 선배가 와서 자기보다 키 크다고 장난스럽게 멱살을 잡았습니다. 그때 그 형이 멱살을 잡아도 저희 둘은 정말 친했으며 저는 당황하기보단 오히려 반가웠습니다.

     기숙사에 올라가서 짐을 풀고 다시 모였고 신입생들은 5개의 조로 나눠졌고 각 조에는 학생조장을 뽑아야 했습니다. 저는 마음다짐으로 제가 조장을 해볼까....? 했으나, 일단 분위기를 파악한다고 나서지 않았고, 이후에는 여자애가 하게 되었습니다.

     스텝조장도 있었는데 저희보다 1살 많은 누나였습니다. 저희 조는 총 9명이였고 남자4명 여자 4명 스텝조장 누나 1명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스텝들은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누나, 형(언니, 오빠) 들을 이름표에 버거 이름으로 되 있었습니다. 캠프장 누나는 불새버거 인가 아이라인을 찐하게 그린 누나였고, 제가 아는 형은 별명이 찐찌버거 였습니다. 저희 스텝조장 누나는 레이디버거 였는데, 스텝들 중에선 제일 미모가 뛰어나보였습니다.

     조이름 조장, 구호, 지킬 거 등을 정하고 다음수업으로 넘어 갔습니다. 다음엔 학교소개 하는 것 이였고 찐찌버거가 수업을 했는데 찐찌버거는 자기소개를 하면서 자기키가 얼마나 되 보이냐고 하면서 키를 공개하였고, 저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말했습니다. 에이....나 보다 작네.. 저의 말에 애들은 웃었습니다.저는 처음으로 애들을 제대로 웃겨 봐서 인지 기분이 좋았습니다.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수업시간엔 휴대폰을 걷어갔기 때문에 아쉽게도 사진을 못 찍었고, 그렇게 첫날은 소개하고 하는 것 말곤 딱히 없었는데, 이동하면서 저희 조 애들이 절대 누나라고 못 부르겠다며 계속 누님, 선배님 레이디 선배님 등등 놀렸고 저는 보다가 그냥 누나라고 불러주라 했습니다.

     친구는 그것을 바꿔 말해서 불쌍하니 누나라고 불러줘 라는 거 아니냐며 저까지 물귀신 하였고 누나한테는 절대 아니라고 해명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루를 끝마칠 때 쯤 기숙사에 들어와서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고, 폰 가지고 놀다가 자려고 하는데, 친구의 코골이는 정말 수준이 술 먹은 느낌으로 코를 골았고 거의 밤에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Posted by 감성사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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