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2월 31일에 태어 난 나는 하루 밤 자고 두 살이 되었어. 
그렇지만 돌 잔치는 만 1년이 지나고 1998년 12월 31일에 하는게 당연하잖아. 

돌 잔치는 집에서 했어. 그땐 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내 돌 잔치 때는 나 보다 세 살 많은 형이 더 좋아했던 것 같아.
외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돌 잔치 한 복을 형과 내가 똑같이 맞춰 입고 집(교방 주공아파트)에서 돌 잔치를 했어. 과일 같은 걸 상에 잔뜩 올려놓고 사진을 찍었어.


그때도 돌 잡이를 했었는데, 엄마, 아빠의 의도대로 '실 타래'를 잡았던 것 같아. 내가 돌이 되기 전에 죽을 고비를 넘겼기 때문에 모두들 장수를 상징하는 '실 타래'를 잡기를 바랬던 것 같아. 하지만 그런 부모님의 바람대로 되지 않아서 너무 미안하고 속상해.

첫 돌 무렵에 당시 마산YMCA가 있던 양덕 1동에 있는 '양덕 사진관'에서 돌 사진을 찍었어. 덩치가 산 만해진 청소년기부터 나를 만난 친구들은 잘 믿어지지 않겠지만 어린 시절 나는 돌 사진 모델이었어. 이 사진관에서 돌 사진을 찍고나서 한 달 쯤 후에 사진관 사장님이 내 돌 사진을 브로마이드(A1) 수준으로 확대해서 전시해둔거야. 

그 땐 지금과 달리 양복점이나 사진관 같은 곳에는 좀 촌스러운 '전시 부스'가 있었어. 길 가는 사람들이 모두 디스플레이 된 옷이나 사진을 볼 수 있도록 바깥을 향해 전시가 되어 있었지. 내 사진은 디지털 카메라가 널리 보급되어 양덕 사진관이 폐업 할 때까지 전시되어 있었어. 

할아버지, 할머니와 고모를 비롯해 우리 가족들은 일부러 그 사진을 보러 양덕 사진관을 갔었어. 그땐 마산YMCA 실무자들이 자주 가는 식당이 사진관 근처에 있었는데... 모두들 지나가면서 내 사진을 보고 한 마디씩 칭찬을 해줬어.

"건호 정말 귀엽게 생겼다고"

바로 이 사진이 양덕 사진관에 전시되어 있던 사진이야. 어찌보면 내가 사진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첫 돌 무렵부터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스물 두살 무렵에 나도 사진 촬영 감독이 되어서 1년 동안 참 많은 사람들의 가족 사진과 리마인드웨딩 사진을 찍어줬었거든. 

지금 우리집 거실에 걸려 있는 가족 사진들도 그 때 CH스튜디오에 근무할 때 찍은 사진이고, 사실 가족, 친구들과 작별할 때 그 영정 사진도 그때 찍은 사진에서 잘라냈거든. 

내가 사진 촬영 감독으로 삶을 꿈꾸게 된 사연을 나중에 따라 말해드릴께요. 아무튼 여러 분이 상상하시는 것보다 어린시절 저는 훨씬 귀여웠답니다. 아빠는 '하얀 달마시안 모자'를 쓴 제 사진이 가장 귀엽게 나왔다고 하지요. 

 

사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태봉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방송부원이 되면서 부터였어. 태봉고에는 내가 좋아하는 윤이 형이 두 명 있었어. 어릴 때부터 같은 체육관에서 태권도를 배우고 YMCA 캠프도 많이 같이 다녔던 윤이 형과 YMCA 이사님 아들 윤이 형인데... 둘 다 방송부의 리더였고...내가 닮고 싶은 형들이었어.(뜻대로 잘 안 되기는 했지만...)

아무튼 태봉고에 다니면서 방송부원으로 학교 행사 때 이런저런 촬영을 하게 되었고, 2학 년 때는 마을 어른신 '장수 사진 촬영 프로젝트'에 참가했어. 그 무렵부터 YMCA 청소년 자전거 국토순례에서도 사진과 영상 편집을 하게 되었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부산에 있는 대학 한 군데와 구미에 있는 대학 한 군데에 원서를 넣었는데, 구미에 있는 대학에만 합력했어. 엄마, 아빠와 함께 구미에 있는 그 대학을 보러 직접 갔었는데 기대보다 너무 교육환경이 열악해서 좀 더 준비를 하고 군대 갔다와서 다시 내가 원했던 대학을 들어가기로 했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잠깐 전문 작가에게 수업을 받기도 했어. 이름을 말하면 다 알 수 있는 송 작가님이야. 태봉고 다닐 때부터 작가님과 인연이 있었는데, 고등학교 졸업 후에 몇 달간 집중해서 공부를 좀 했지. 그 덕분에 돈은 안 되는 자원봉사 요청은 많이 받았어. 가장 대표적인 곳이 마산YMCA였지. ㅋㅋ 

아기스포츠단 캠프와 운동회, 가족의 밤을 비롯한 크고 작은 행사 때마다 요청을 받았고, 원탁토론, 자전거 국토순례, 마산YMCA 회관 개관식을 비롯한 큰 행사들도 촬영을 했었지. 큰 행사 때는 혼자 한 건 아니고 쉼표 성진샘, 그리고 스승이신 송 작가님 같은 분들과 함께 했지만.

아 그러고 보니 필리핀에서 6개월을 지내는 동안에도 사진 공부를 좀 하고 왔네요. 

하지만, 진짜 사진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된 건 CH스튜디오에 입사하면서부터야. 창원 상남동에 있던 스튜디오가 지금은 없어졌지만 여기서 근무하면서 사진을 많이 찍고 동호회에도 나가고 하면서 '실전 공부'를 많이 하게 되었어. 아빠보다 사진을 더 잘 찍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 스물 네살, 짧은 생을 살다 떠난 저를 위해 제 아빠가 쓰는 이건호 이야기입니다. 

Posted by 이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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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그룹 GOD가 처음 불렀던 '길'입니다. 
특히 비긴어게인에서 불렀던 '길'을 좋아합니다. TV 시청보다는 컴퓨터 게임을 좋아합니다만, 비긴어게인은 '본방사수'를 하려고 했고, 엄마가 그 사실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사고를 당하고 병원 응급실과 중환자실에 누워서 일주일을 보내는 동안 엄마, 아빠, 형은 여러 차례 유튜브를 찾아서 비긴어게인에 나오는 '길'을 틀어주었습니다. 서울에서 내려와 병원 3층 복도를 엄마, 아빠와 함께 지킬 때, 15분 짧은 면회시간에 형은 울먹이면서 제 귀에 대고 '길'을 불러주었습니다. 

아빠는 사실 이번 사고가 아니었으면 제가 '길'이란 노래를 가장 좋아한다는 사실을 몰랐을지도 모릅니다. 음치인 아빠는 노래를 부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듣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노래를 유난히 좋아했던 것은 노래 가사에 나오듯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지금까지 내내 '내 길'을 찾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저 처럼 자신의 길을 찾아 고민하고 방황하는 청년들에게는 아주 많이 공감되는 노래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사람들은 길이 다 정해져 있는지 아니면 자기가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또 걸어가고 있네
나는 왜 이길에 서 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무엇이 내게 정말 기쁨을 주는지 돈인지 명옌지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인지
알고 싶지만 알고 싶지만 알고 싶지만 아직도 답을 내릴 수 없네
자신있게 나의 길이라고 말하고 싶고 그렇게 믿고
돌아보지 않고 후회도 하지 않고
걷고 싶지만 걷고 싶지만 걷고 싶지만
아직도 나는 자신이 없네
나는 왜 이길에 서 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그건 누굴 위한 꿈일까
그 꿈을 이루면 난 웃을 수 있을까
오 지금 내가
어디로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살아야만 하는가
나는 왜 이길에 서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길에 끝에서 내꿈은 이뤄질까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그건 누굴위한 꿈인가
그꿈을 이루면 난 웃을 수 있을까?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이 노래 가사처럼 저도 제가 가는 길이 어딘지 알 수 없었지만 열심히 걸었습니다. 

엄마, 아빠는 길을 찾는 제 걸음이 느리다며 자주 재촉하였지만, 저는 "이게 정말 나의 길"인지 모르는 불안감을 안고 서 "그곳이 어딘지 알 수 없"는 길을 걸었습니다. "이게 정말 나의 길"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빠나 엄마의 기대만큼 빠르게 걷지는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걸음을 멈춘 적은 없습니다. 

내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만...

엄마, 아빠는 제가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였습니다. 아빠는 다양한 경험을 쌓게 해주려고 이런 저런 노력을 많이 하였습니다. 여덟 차례 참여한 자전거 국토순례, 백두산 자전거 여행, 지리산 등반, 발리 여행, 태국 여행, 일본 여행, 필리핀 꿈꾸는 청년 봉사단 활동 그리고 제가 혼자서 다녀온 제주도 라이딩 같은 것은 모두 엄마, 아빠가 제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경험 쌓기였답니다. 

하지만, 제 마음 속에는 '두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체험을 하면서도 좀 처럼 배움이 쉽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청년이 되었을 때는 그때 왜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남곤하였답니다. 

제가 하늘나라로 떠날 때, 엄마, 아빠가 가장 후회한 것은 그냥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다 할 수 있게 했어야 하는데 왜 못하게 막았을까 하는 후회였습니다. 서울에 놀러 갈 수 있게...용돈도 더 넉넉히 쓸 수 있게...갖고 싶은 것 가질 수 있게 못해준 것을 많이 후회하였습니다만,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엄마, 아빠 그리고 세상 누구도 심지어 저 자신 조차도 제가 이렇게 훌쩍 하늘나라로 이사하게 될 줄을 몰랐다는 것을. 

엄마, 아빠가 안 된다고 한 것들은 대부분 제가 더 상처 받고 주눅들까봐 못하게 한 것들이고, 넉넉한 용돈을 주지 않은 것은 제 미래를 준비하는 종잣돈을 만들어주시려고 그랬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엄마에게 후회할 실 일이 아니라고 말해드리고 싶습니다.

스물 네살 짧았던 세상 여행에서 가장 아쉬운 것은 노래말의 끝 구절처럼 제 길의 끝까지 걸어가보지 못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엄마, 아빠는 하루 15분 짧은 면회를 들어오면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제가 응급실에서 하루 밤을 보낼 때도 엄마는 저에게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제가 아기 때 저를 안고 불렀던 노래들입니다.  '섬집 아기'와 "은자동아 금자동아'를 불러주며 엄마, 아빠는 많이 울었습니다. 

형과 제가 태어났을 때 모두 출산 휴가만 마치고 일터로 갔던 엄마는 미안한 마음이 담긴 '섬집 아기'라는 노래를 참 많이 불러주었습니다.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갈 때,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 배고 스르르러 잠이 듭니다." 하는 이 구절에 특히 마음이 많이 갔던 모양입니다. 저를 두고 매일 아침 일터로 나가는 모습이 많이 닮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아빠가 이 노래를 따라 부르며 여러 번 눈물을 흘리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미 들을 수도 없고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많이 다녔지만 엄마, 아빠의 노래 소리를 귀가 아니어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제 가슴에 얼굴을 묻고 불러주는 엄마의 노래를 온 몸으로 듣고 또 들었습니다. 

 

※ 스물 네살, 짧은 생을 살다 떠난 저를 위해 제 아빠가 쓰는 이건호 이야기입니다. 

Posted by 이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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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재작년 8월 '꿈꾸는 청년 봉사단'이라는 이름으로 필리핀에 파견을 다녀왔습니다. 6개월 정도 다녀왔었고 그 덕에 군대가 밀렸습니다. 군대를 미루고 다녀왔던 필리핀은 저를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기회였고, 그 속에서 활동 하면서 제 관심사 였던 '사진'으로 다양한 장면을 담았습니다.

 사실 지금 생각 해보면 아쉬운 점이 많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저 자신을 돌아보고 조금 더 잘 살게 되었으니까요. 봉사를 다녀왔을 땐 2월 이었고 먹고 놀다가 군대 가야겠다는 생각에 놀다 집에서 이러고 살면 되냐 직업전문학교 같은 곳이라도 다녀라~ 해서, 직업전문학교 편집 디자인 반에서 6개월 과정을 이수 하였습니다.

 정신 없이 이리저리 보내다 2018년 2월이 되었고 저는 졸업 후 취업성공패키지를 통한 사후 관리를 받으면 취업을 마음 먹었습니다. 결과적으론 지금 다니고 있는 스튜디오에 취업을 했었습니다. 원래 5월에 입대 신청을 했었지만 제가 취업한 곳이 너무 좋았고, 그만두고 싶지 않아서 군대를 다시 미뤘습니다. 

 필리핀을 다녀와 중간중간 단원들과 카톡 정도는 할 수 있었으나 다 각자 다른 지역에 살고 있었고, 무엇보다 제가 마산에 살고 있는 터라 만나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최근 여름휴가가 나왔고, 이번에 시간 내서 한번 봐야겠다 생각 후 여름 휴가 때 대전을 향했습니다.

 국토순례 때문에 자전거를 타고 지나친 적은 있었지만, 그냥 걸어다닌 건 처음이었습니다. 지금 드는 생각이지만 국토순례는 많이 참여했지만 혼자 또는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간 적은 별로 없더라구요. 중,고등학교 때도 그냥 집 근처, 다른 곳 나가봤자 창원지역 내에서 돌아다녔고 사실 어딜 많이 가본 적이 없더군요. 

 꿈봉 단원 전체가 아닌 YMCA로 파견됬던 사람들과 만났습니다. 그래서 대전에서 모였던 거구요. 대전에서도 너무 더워 어딜 더 돌아다니거나 구경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밥 먹고 보드게임 카페에 가서 게임 하면서 대화나 하는 정도이긴 했으나, 사석에서 만난 건 정말 오랜만 이었습니다. 

사진은 다양하게 찍지 못하였지만 오랜만에 봐서 너무 좋았습니다. 공적으로 중간중간 자리가 마련되서 얼굴을 볼 수는 있었으나, 제대로 이야기는 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이때 만났을 때도 같이 파견 나갔던 단원 한명이 바빠서 만나지 못했습니다. 직장을 가지기 전에도 만나기 어려웠지만, 직장을 가지게 되면서도 사람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때 헤어지면서 꿈봉 4기 전체가 다 함께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다같이 만나서 MT처럼 놀아보자~ 했지만 사실 그게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너무 나 바쁜 일상 속에서 한번쯤 시간내기가 너무 어렵더라구요... 직장을 가져서 직접 돈을 벌면서 다양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6/08/27 - [일상] - 필리핀에서 찾아온 우울... 극복해내다.

2017/03/06 - [일상/성인새내기의 이야기] - 생애 첫 사진전

2016/07/13 - [필리핀 해외연수] - 해외봉사활동 준비...KCOC 국내연수 첫날...

2016/08/10 - [필리핀 해외연수] - 필리핀 파견 첫날, YMCA 연맹에서 보낸 하루

2016/08/15 - [필리핀 해외연수] - 필리핀에서의 첫 주말! 새로운 배움.


Posted by 감성사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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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로 7번째 국토순례에 참여하였습니다. 중학생 때부터 참여 했던 YMCA자전거 국토순례는 처음에 자전거를 탈 때에는 엄청 힘들고 몸도 안좋아서 중간 중간 코스를 건너뛰고 버스를 타거나 했습니다. 처음 참여 했을 때 버스 탔던 것이 조금 창피하기도 하고 해서 다음 해에 한번 더 참여하였습니다. 참가자로 총 3회 참여 했었습니다. 지금은 그떄 함께 참여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습니다.

 국토순례에 4번째, 5번째는 자전거를 타는 참가자가 아닌 홍보팀(아이들 자전거 타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일을 했었음)에서 활동 했습니다. 홍보팀 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고등학교 때 방송부를 하면서 사진과 영상을 찍고 만들어 보면서 국토순례에서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3년 정도 자전거를 타고 나니 뭔가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홍보팀은 주로 낮에 사진을 찍고 밤에는 마지막 도착지에서 틀어줄 영상을 제작합니다. 그래서 잠을 깊이 자지 못하게 되더군요. 차를 타고 다닌다해서 전혀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전거 타는 만큼 힘든 일이었습니다.

 작년에는 총무팀에 들어가서 활동 했습니다. 총무팀에서는 자전거가 막지 못하는 큰 도로에서 경찰과 함께 교통을 통제하여 최대한 빨리 자전거가 지나갈 수 있도록 통제합니다. 또한 간식, 밥, 숙소 등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사실 자전거 타는 아이들에게는 이 3가지가 가장 중요한 요인입니다. 총무팀 역시 차를 타고 다닌다 해서 편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밥 먹을 때 배식한다고 밥을 못먹거나 하는 일도 자주 생기며, 정신적 스트레스가 큰 역할이었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홍보팀과 총무팀을 하면서 프로그램팀이나 필요한 곳을 도와가며 다양한 곳에서 해보면서 '아 자전거 국토순례는 역시 자전거 타는 것이 제일 마음이 편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올해에는 로드 지도자로 함께 했습니다. 사실 참가자도 하고 다른 스텝으로도 하면서 로드 지도자가 정말 멋있어 보였습니다. 로드 지도자들은 주로 도로에서 대열이 지나갈 수 있도록 차를 막거나 뒤에 처지는 아이들을 밀고 올라가는 역할을 합니다. 언제나 느꼈던 건 참가자, 홍보, 총무, 프로그램 팀을 하는 것보다 로드 지도가 길 막거나 애들 밀어줄 때 굉장히 멋있어 보였습니다. 참가자 때는 나도 나중에 저렇게 애들 밀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걸 올해가 되서야 처음으로 해 보았는데 너무 재미 있었습니다. 밑에 사진은 자전거를 타던 사진 입니다.

 재미있던 와중에 뒷처진 참가자 1명을 밀어주다 낙차 사고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전거는 계속 탔습니다. 자전거 속도가 35~40으로 달리던 중이어서 넘어지면서 굴렀더니 다양하게 다쳤었습니다. 다양하게 다치고 피도 많이 흘렸지만 그럼에도 탔던 이유는 처음 로드지도자로 와서 넘어진 것도 창피한데 거기다가 버스까지 타는 것은 정말 창피하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자전거가 고장나서 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다쳐서는 타지 말자.' 하는 생각을 하였고 저는 최선을 다해 자전거를 탔습니다.

 덥고, 지치고, 힘들고 하는 자전거 국토순례를 매년 가는 이유가 뚜렷한 것이 있다면, 매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 입니다. 물론 참가자 때는 다시 온 걸 후회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스텝 활동을 하면서 국토순례의 색다른 재미도 느끼고 다양한 경험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힘든 일을 이겨내고 그 자리에 섰을 때 느끼는 그 감동은 뭐라 표현하기가 힘듭니다. 물론 혼자서 했을 때도 감동을 느끼지만 7박8일 동안 함께 밥을 먹고, 자고, 씻고, 힘든 구간에서 함께 언덕이나 산도 오르며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함께 느끼는 그 기분은 혼자 했을 때보다 2,3배보다 더 큰 감동과 감정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날 특히 이러한 감정들이 모두 극대화 되는데, 제가 느낀 감정들은 이러합니다. 모두가 힘들지만 함께 이겨냈을 때 느끼는 해내면서 생기는 자신감, 끈기와 노력에 대한 보상 처럼 느껴지는 뿌듯함, 7박8일 동안 정들었던 친구들과의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 집에 간다는 설렘 등 많은 감정들이 교차하게 됩니다. 보통 헤어질 때 페이스북과 같은 SNS 친구가 되거나 전화번호를 주고 받습니다.

 이렇게 해서 연락을 하고 살기도 하고 자전거를 함께 타기도 하고, 때로는 저희들만의 뒷풀이를 가지기도 합니다. 서로 지역이 다르지만 한번쯤 모여서 술 또는 밥을 먹으며 내년에 또 한번 모이자는 약속을 하거나, 앞으로도 계속 친구로 지내자 하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이러한 여러 감정과 소중한 추억들이 제가 7년 동안 다녀온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7박8일동안 진행되는 YMCA자전거 국토순례는 자전거를 타든 타지 않든 찾아오는 시련을 이겨내고 새로운 인연을 만드는 프로그램 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전거를 타지 않아도 찾아오는 시련은 있고, 참가자, 실무자, 자원봉사자 등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는지 그 직위가 어떠한지는 상관없이 시련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이 자전거 국토순례에 계속 참여를 하고 싶습니다.

Posted by 감성사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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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달동안 정말 아무 일도 시키지 않고 그저 적응하는 기간. 어떻게 보면 이 기간이 가장 중요할 수 있지만, 나는 이 기간에 그저 폰으로 게임만을 즐겼다. 아무것도 안한다고 잔소리 하거나 챙기는 사람도 없다. 

그저 밥 시간이 되면 밥을 먹고 씻고 싶을 때 씻었다. 그래도 일어나는 시간은 정해져 있어서 그 시간에 일어나려고 노력중이다. 한국과 1시간 밖에 차이 나지 않지만 그래도 나름에 시차적응도 필요했다. 


처음 일주일은 굉장히 의욕도 넘치고 블로그 글도 열심히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생각했던 약속들은 자연스레 잊혀져 갔다. 영어에 대한 두려움도 극복하려 소통하고 싶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반복적으로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졌다. 우울한 감정을 남들에게 많이 알리는 편이 아니며, 굳이 걱정시키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과 있을 땐 웃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잘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많이 웃으려고 했고, 항상 웃고 있는 인상을 남기고 싶었던 '나'였다. 우울해도 한국에 지낼 때처럼 친한 친구와 연락을 하면 괜찮을 줄 알았고, 평소 연락 안하던 애들과도 연락하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한국에 있는 친구나 가족들과 연락을 하면 할 수록 계속 한국이 생각났고, "내가 여길 도대체 왜 온거지...?"라는 생각이 들며 약간에 자괴감도 들었다. 그러면서 한국을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정말 많이 들었다.


그러다 나보다 먼저 다녀온 꿈봉 2기 선배(선배지만 나랑 동갑이라 그냥 친구하기로 함.)와 연락을 하며, 조금 씩 회복했다. 평소 많이 힘들 땐 친구와 비속어도 섞어가며, 거친 표현으로 이야기 하면 조금은 마음이 풀어졌었다. 

하지만 여기 처음 오기 전 거친 표현을 쓰지 말자고 했었고, 그래서 인지 조금 더 쌓이는 게 많았다. 처음에 한국에 있을 땐 "남자 단원은 너 하나야" 라는 이야기가 별로 신경쓰이지 않았다. "나는 알아서 잘 풀어낼거고, 다 참아낼 거다."하는 생각만했지 남자 단원이 나 혼자고 그로 인해 우울해 질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왜냐하면 고등학교 졸업 이후 낮 시간에는 거의 혼자 있는 시간들이 많았고, 그래서 더욱 더 괜찮을 거 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내 감정을 진지하게 털어놓고 이야기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 이었다. 낯선 땅에서 역시 혼자 버티는 건 어려운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연락한 것이 꿈봉 2기선배 였고, 이러저런 이야기를 하다 그냥 책이나 읽어라, 책 읽으면 시간 괜찮게 지나간다고 했다. 나는 한국에서도 읽지 않던 책이 과연 여기서 읽어질까 생각했지만, 휴대폰과 아이패드를 한쪽에 치워놓고 책을 폈다. 

내가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책은 총 3권 '언틸유어마인' 이라는 미스테리 소설책과, '금요일에 돌아와요' 라는 세월호 관련 책,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제주도로 혼자 자전거 여행을 떠났을 때 건축학개론 촬영지 서연의 집에서 산 '건축학개론 기억의 공간'이라는 책을 가지고 왔다. 

책은 우선 '건축학개론 기억의 공간'부터 읽었다. 그러다가 블로그에 짧게나마 독후감이나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우울하게 보내던 시간엔 책을 보고 있다. 다시 우울해지고 외로움을 느끼는 순간이 분명 올 거라고 생각한다.

그때마다 감성적일 때가 많은 난 분명 많이 우울해 할 것이고, 남들에게 들키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우울하냐고 힘드냐고 물어도 나는 괜찮다고 대답할거고 하루하루가 즐겁고 재밌다고 이야기 할 것이다. 그러다 정말 마음을 여는 순간이 오면 어떤 점이 힘들고, 이런 점에서 상처를 받는다고 말하며 다 털어놓을 것이다. 

물론 이런 점들을 이해 못할수도 있고 마음에 안들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고치지 않을 생각이고, 나 혼자 스트레스를 풀고 무기력함을 이겨내며 성장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적응 1달동안은 어떻게 잘 적응한 거 같다. 

일단 기계들을 내려놓고, 책을 잡았다는 것에 만족하며, 책도 읽어서 독후감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한국에서 한 다짐들 중 가장 큰 것은 매일은 힘들 거 같다는 생각에 매주 블로그에 글 1편은 쓰겠다는 목표가 있다. 꼭 내가 이 목표를 잘 이루어 냈으면 하는 혼자만의 작은 바램이다. 

그리고 내가 여기에 온 목적이나 이유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남들이 보기엔 굉장히 답답할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목적이나 이유는 지내면서 찾아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나의 필리핀에서 우울은 내가 성장하는데 밑거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6개월 뒤에 나의 모습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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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서의 첫 주말을 맞이했다. 길고도 짧은 1주가 훌쩍 지나갔다. 필리핀으로 출발하는 화요일 아침까지만 해도 한국을 떠난 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는데 어느새 필리핀에서 첫 주말을 맞이했다.

토요일엔 농구와 가라데 수업을 했고, 일요일에는 줌바와 가라데 수업이 있었다. 아침 9시부터 진행되었던 농구 수업은 기초 몸풀기 1시간으로 땀을 엄청 흘렸다. 그렇지만 땀을 흘린 거에 비하면 그렇게 까진 힘들지 않았다. 

처음엔 몸풀기 운동으로 시작해서 달리거나 제자리 뛰기 같은 점프력과 순발력이 필요한 운동을 했다. 평소 자전거와 수영으로 체력이 늘어 있었던 나에겐 결코 힘든 배움이 아니었다. ​


이후엔 3점 라인에서 한 발자국 정도 들어간 자리에 서서 슛을 연습했는데, 못 넣으면 푸쉬업 5회 링에 닿지도 않을 땐 푸쉬업 10회로 많은 운동량이 요구 되었다. 나는 처음이어서 그런지 코치님이 푸쉬업을 시키지는 않았지만 다음주부턴 나도 해야 될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후엔 가라데 수업이 있었는데,  각각에 동작들이 너무나 태권도와 비슷하였고, 자세를 익히거나 각각에 동작들을 고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태권도를 꽤나 오랫동안 쉬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에 익숙해 있던 자세들 때문에 가라데 수업이 좀 힘들었다. 

물론 발차기 할 때 만큼은 익숙한 동작들 덕분에 훨씬 편하고 오랜만에 쭉 펼 수 있는 다리운동이어서 그런지 굉장히 좋았다. 뭔가 다시 태권도를 하고 싶은? 그런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러한 하루들을 보내고 일요일엔 줌바와 가라데 수업을 받았다. 물론 나에게 별로 흥미롭지 못했던 줌바는 다른 단원들만 수업을 듣고 나는 옆에서 구경을 하거나 단원들 사진을 찍어주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가라데 수업도 나는 받지 않았다. 

가라데 같은 경우도 수업을 받으면서 몸도 풀고 다시 유연해지면 좋을 거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태권도와 너무 기본기가 비슷해서 품세나 세세한 동작들을 바꾸는 것이 너무 불편했던 나는 결국 가라데 수업은 받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 

태권도와 가라데의 차이를 간단히 설명 받았는데 이 둘의 차이는 태권도에 주요기술은 대부분 발차기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가라데는 발차기 뿐만 아니라 손을 이용한 기술도 허용이 되고, 더 많은 기술들이 있었다. 

물론 태권도도 품세를 하거나 기본기에서는 손 기술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발차기를 쓰기 때문에 손과 발을 함께 쓰는 가라데와는 다른 운동이다. 

일요일은 정말 푹 쉬었다. 적응 못해서 잠도 잘 못 이루고 매일 밤 가라오케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들 때문에 잠을 잘 못 잤는데 일요일 오후에 계속 낮잠 자면서 그 피로들을 풀 수 있었다. 앞으로의 생활도 기대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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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파블로에 도착하고 나서도 계속되는 영어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팀원들 외에는 한국말 할 상대도 없고, 여기 사람들 발음이 영어듣기 평가처럼 뚜렷하지 않아 더 알아 듣기어렵다.  모르는 단어 모가 많다보니 해석하기도 힘들었다. 

물론 간단하게 소통할 수 있는 말들도 있지만, 아직 내가 말문이 트이지 않아 소통이 더 어렵다. 나도 잘 소통을 하고 싶지만 쑥스럽고 부끄럽기도 하고 단어가 떠오르지 않다보니 소통하기 굉장히 힘들다.

아침엔 일어나서 YMCA에서 15분로 걸어 갈 수 있는 호수에 갔다. 정확한 이름 듣지 못해 적지 못했지만 다음엔 꼭 알아서 블로그에 남기겠다. 호수 근처에서 아침을 먹고, 산파블로 박물관을 방문했다. 우리는 산파블로 주변에 있는 7개의 호수에 관련된 전설에 대해 설명을 들었지만 제대로 알아 듣지 못하니 사실 상 기억에 남거나 하는 것은 없었다.

박물관에서 필리핀에 역사에 대해서도 긴 설명을 들었지만 간단한 단어만 들리고 거의 대부분 들리지 않아서 지루하였다. 박물관에 다녀온 후 9월부터 방문하여 피딩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될 학교로 향했다. 처음 국내교육을 들을 때만 해도 어린 학생들 대상으로 하는 줄 알고 있었는데 대상이 달라졌다. 학교에는 초, 중, 고 학생들이 다 있었다.

물론 한국에서의 나이와 학년 개념은 버려야 했다. 아이들의 발음이 능숙하지 않아 솔직히 알아듣기 어려웠다.  1달이 지나고, 2달이 지나면 조금 더 잘 들을 수 있게 될거라는 기대는 있다. 기본적인 자기 소개는 할 수 있지만 영어에 익숙하지 않아 일상 대화를 이어가긴 어려웠다. 단어라도 조금 더 익히고 나면 바디 랭귀지를 섞어가며 이야기 하면 웬만큼은 가능할 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오전 시간에 호수와 박물관 피딩 프로그램을 진행할 학교를 돌아보고 다시 YMCA로 돌아와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3시반까지 쉬었다가, 마미에게 산파블로YMCA의 설립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지금의 Y가 만들어지기까지 역사를 영어로 들었다. 한국말은 조금 흘려 들어도 나중에 기억할 수 있지만 영어는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굉장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내가 해석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고, 멘토누나의 통역만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평소 한국에서 있을 때 영어와 별로 친하지 않았으며, 고등학교 때도 그렇게 영어와 친하지 못했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영어 학원도 다니고 하며 조금 외우는 것이라도 있었지만 약 3년을 놀고 졸업 후에도 영어랑 친하지 못한 상태이다 보니 지금 많이 힘들다.

물론 필리핀 파견 전에 집에서 영어 공부 좀 하고 가라는 권유가 있었지만, 필리핀 파견이 현실로 와 닿지 않다보니 영어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더 힘든 것 같다. 하루 일정이 끝나고,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바탕Y 친구들과 함께 갔다가 왔다. 바탕Y는 한국으로 치면 학교 밖 청소년 개념인데, 다음에 산파블로 YMCA를 소개할 때 조금 더 자세히 소개하겠다.

마트에 다녀와서는 저녁 먹을 준비를 했다. 6개월 동안 지내면서 1달에 한번씩 바탕y 친구들과 베프가 되는 제비뽑기을 진행했다. 이 베프에 의미는 현지 생활 적응도 하고 함께 공부도 하라는 의미에서 짝을 지어는주는 것인데 마미의 아이디어이다. 

영어로 듣기, 말하기가 잘 되지 않은 나는 굉장히 걱정이 되 지만, 그래도 열심히 해보려는 마음가짐으로 지내고 있으니 어떻게든 되지 않겠는가? 가능한 빠른 시일내에 산파블로YMCA 설명편을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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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기상 시간은 8시. 9시에 아침을 먹고 11시 부터 마닐라 '시티투어'를 했다. 우리는 시티투어를 하고 바로 산파블로로 이동하는 일정이어서 일반 버스 대신 마닐라Y 벤을 타고 이동했다. 시티투어는 성당, 공원, 박물관 순서로 진해 되었다. 필리핀이 카톨릭 국가이기 때문이겠지만 박물관에는 성당 또는 신부님 모습을 그려 놓은 그림들이 굉장히 많았다.


보통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둘러볼 때는 한 작품에 충분한 시간을 머물러 보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산파블로로 이동도 해야하고 볼 그림들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 차근차근 자세히 들러볼 수 있는 여유 없어 아쉬웠다. 

박물관에는 종교와 관련 없는 다른 작품들도 있었는데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그림들을 보며 나도 저런 그림들의 느낌을 사진으로 표현해내고 싶다는 생각들이 가장 먼저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넉넉하지 못해 여유있게 살펴보지는 못했다.  
시티투어를 마치고 차에 타자마자 나는 기절하듯 잠 들었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니 급격히 피로가 몰려홨고, 산파블로까지 차로 계속 이동하였기 때문에 여유롭게 잠을 청했다.

산파블로로 넘어가기 전 식당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는데 또 다시 패스트푸드점 이었다.  우리가 사달라고 부탁하지 않아도 알아서 사주셨고, 벌써 싫증이 날 정도다. 너무 기름지고 짠 음식을 매일 먹다보니 조금 힘들었고 다시 살이 찌는 듯한 느낌이어서 걱정도 된다. 

점심을 먹고 다시 차를 달려 산파블로시로 향했다. 약 1시간 반 정도 걸렸는데 한 숨 자고 나니 더 이상 잠도 오지 않고해서 그냥 노래만 열심히 들었다. 산파블로 YMCA에 도착해보니 많이 설레고 기대가 되었다. 농구장도 굉장히 크고 숙소도 나쁘지 않았다. 

짐 정리도 덜 되고 어떻게 정리해야할지 감도 안 잡히지만 그래도 일단 기대가 되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우리 또래 청년들이 보였고, 영어로 인사하고 영어로 대화하는데 듣는 건 가능했지만,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말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우리말은 머리 속에 맴돌지만  문장으로 만들어야 하는 영어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무척이나 힘들어 하는 중이다.

적당히 짐을 풀고나니 우리를 환영하는 파티를 준비해주었다. 카메라를 챙겨 사진을 찍지 못한 게 아쉽지만 계속적인 영어듣기 때문에 체력소모가 컸다. 환영파티를 하며 우리 단원들에게 영어이름을 지어줬는데, 내 영어 이름은 ALDEN으로 정해졌다. 

ALDEN 필리핀 남자 배우의 이름이라고 했다. 처음엔 배우라 해서 굉장히 부담스러웠는데 인터넷에 이 배우를 검색해보고나서 더 부담스러워졌다. 이 배우의 이름을 검색 했을 때 연관 검색어에 필리핀 미남배우라고 나왔기 때문이다. 사실 이 배우와 나의 닮은 점은 키가 크다는 것 뿐이다. 

어쨌든 산파블로 YMCA 도착 이후엔 아직 사진을 제대로 못 찍었다. 차에서 정신 없이 보내고 앞으로의 생활이 설레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하였으며, 모기나 쥐 때문에 조금 걱정도 된다. 내일부터 산파블로YMCA의 시설과 주변 자연환경과 풍경을 살펴보고 글을 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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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 30분에 필리핀에서의 첫 아침을 맞이하였다. 현지에서 구입할 거라고 생각하고 샴푸를 사오지 않은 나는 아침에 어떻게 씻을지 고민하다, 폼클렌징으로 씻을 생각을 하였는데, 샤워장에 비누가 있어 비누로 머리를 감았다. 비누로 감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침은 joilibee(졸리비)에서 간단하게 햄버거와 팬캐익을 먹었다. 맛은 있었지만 많이 먹을 수는 없었다. 우리 집에선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다보니 이곳 음식이 너무 기름지고 대체로 짰기 때문에 입맛에 맞지 않아서 먹기 어려웠다.

아침을 먹고 9시 30분쯤 필리핀 연맹으로 돌아와 필리핀 YMCA 역사 이야기를 듣고 어떤 활동들을 해왔고 지금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소개를 받았다. 강의 시작 전 간단한 자기소개를 했는데, 모든 소통을 영어로 하다보니 정말 영어가 늘지 않을 수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의는 당연히 모두 영어로 진행되었는데 말이 빨라서 인지 알아듣기 어려웠고, 결국 멘토누나의 간단한 한국어 통역으로 어느 정도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필리핀Y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끝나고 마미와 간단하게 영어로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듣기 많이 어려웠지만 그래도 중간중간 들려오는 아는 단어들이 많은 문장들은 조금 알아 들을 수 있었다. 

강의를 듣고 SM몰DP 갔다.  한국의 롯데마트나 홈플러스 같은 곳이다. 여기서 점심을 먹고 잠시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다. 비슷하지만 낯선 대형마트를 약 1시간 정도 둘러보고 바로 숙소로 돌아와 쉬었다.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잠을 청했고, 오후 3시에 다시 필리핀 Y연맹으로 가서 저녁을 몇시에 먹을건지를 정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와 휴식을 했다. 

숙소에서 쉬면서 '앞으로도 이런 휴식 시간이 많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시간들을 어떻게 지내야 할지가 가장 큰 고민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첫날은 영어가 가장 고민이었는데 둘째 날 생긴 고민은 앞으로 빈 시간들을 어떻게 채울까 하는 두 번째 고민이 생겼다.  

저녁 6시 우린 다시 SN몰로 향했다. 필리핀 식사문화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각자 자기 먹을 음식을 시키지 않고 네 다섯가지 공통 메뉴를 주문한 다음 각자 자기 그릇에 담아서 먹었다. 필리핀에 와서 현재까진 계속 그렇게 먹고 있다. 

저녁을 먹고 소화도 시킬 겸 다시 마트를 둘러보았다. 앞으로 6개월을 지내면서 SM을 이용할 일이 많을테니 어떤 물건이 있는지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았다. 낮에는 옷 매장만 보고 나왔는데 저녁에는 지하에 식품관을 살펴보았다. 낯선 외국 음식들과 향신료를 구경하다 보니 옷을 볼때 보다 훨씬 시간이 많이 걸렸다. 


낮에 옷 구경 할때는 깜박하고 사진을 찍지 않았다. SM마트를 구경하면서 느낀 건 뭔가 인터넷 쇼핑몰을 한 건물에 다 집어 넣어 놓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의류 매장은 선택에 폭도 넓고 옷도 다양하고 재질도 좋아 보였다. 국내에도 알려진 브랜드 제품들은 한국보다 가격이 싸서 쇼핑욕구가 많이 솟았다.

작년 기수가 쇼핑을 되게 많이 했다던데 막상와서 경험해 보기 전엔 이해가 안 되었는데 경험을 해보니 쇼핑에 욕심이 생긴다는 것이 이해가되었다. SM 정말 들어가서 느낀 의식주 중에 의식은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국보다 디자인도 이쁘고 가격도 싸서 너무 좋았고 돌아 갈 때 옷은 한 벌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일과를 마치고 생각해보니 오늘 하루는 SM몰에서 시작해서 SM몰에서 끝났다. 아침, 점심, 저녁을 모두 SM몰 안에서 먹고 노는 것도 SM몰에서 놀았다. 한국에서 필리핀까지 비행기를 타고 온 첫날에 비해 시간적으로는 훨씬 여유로웠고, 적응도 꽤 된 편이어서 조금씩 안정감이 생긴다. 그래도 긴장의 끈은 놓지 못하니 여유로워도 여전히 피곤한 하루다. 

마지막으로 오늘 먹은 음식 사진들이다.  첫번째는 아침식사고 밑으로는 점심, 저녁 메뉴에 먹었던 음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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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오전 8시, KCOC가 파견하는 '꿈꾸는 청년 봉사단' 단원으로 필리핀에 6개월 간 국제자원활동을 하러 떠나게 되었다. 전날 오후에 서울에 올라와 마지막으로 마트에 들려 빠진 준비 물품들을 추가로 구매하고 새벽 4시 30분에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필리핀 산파블로로 파견되는 인원은 나를 포함하여 4명 이다. 나 혼자 남자이고 멘토를 포함해 여자가 세 명이다.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출국 수속을 마치고 빠르게 게이트를 통과하여 엄마와 마지막 전화 통화를 하고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를 타고 4시간쯤 지나 마닐라에 도착했다. 막상 마닐라 공항에 도착해서도 6개월 간의 해외봉사활동이 별로 실감 나지 않았다.

필리핀은 교통이 원활하지 못해서 마미(필리핀 산파블로 YMCA 크리스티 사무총장님을 '마미'라고 부름)께서 조금 늦게 도착하셨다. 마미도 4시간 동안 차를 타고 왔다고 했다. 필리핀은 우리나라보다 더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공항에 도착했을 때 비가와서 우리나라보다 시원한 느낌이었다. 마미를 만나 간단히 요기를 하고 필리핀 YMCA연맹으로 왔다.

숙소는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았고, 필리핀은 KCOC에서 교육 받을 때 상상했던 것보단 괜찮은 편이었다. 사실 도착하면서부터 앞으로의 지낼 일이 걱정되긴 하였지만 나름 즐겁게 최대한 웃으려고 노력 중이다. 언어적인 부분도 최대한 귀 기울여 알아 들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직 말이 안되서 대답을 할 수는 없지만 짧은 영어로 라도 기회가 되면 내 생각을 이야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일행은마닐라에서 이틀을 머물고수요일에 산파블로로 이동한다. 마닐라에서 2박을 하는데 필요한 짐을 따로 챙기고 남머지 큰 짐들은 산파블로 YMCA로 먼저 보냈다. 필리핀 YMCA 연맹에 들러 간단한 인사를 하였다.

5시반부터는 저녁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왔다. 마카티 YMCA총장님, 연맹사무총장님, 마미, 현지 간사님 2명 그리고 이윤희 국장님(한국YMCA연맹 소속)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다. 다들 필리핀 음식이 많이 짤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막상 음식을 먹어보니 조금 짜기도 했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 했다. 

하지만 이것 저것 새로운 음식을 먹으면 먹을수록 정말 짰기는 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도저히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들을 위해 마카티 사무총장님께서 정말 많은 음식들을 시켜주셔서 다양한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저녁 식사 때 먹은 음식 중에 제일 인상 깊었던 건 역시 망고 쥬스였다.

한국에서 먹던 인공적인 맛과는 차원이 다른 현지 망고 정말 리얼 망고 쥬스를 먹었다. 정말 말로 표현을 다 못할 정도로 맛있었다. 6개월간 망고를 정말 질리도록 먹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저녁을 먹은 이후 숙소에 도착하자 다들 너무 피곤해서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남자가 혼자라서 방도 혼자 써야해서 일찍 방에 들어가지 않고 이 글을 쓰고 있다. 방에 들어가면 혼자지만 로비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지 조금 덜 외로운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산파블로로 이동해서는 뭔가 의미있게 시간을 보낼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카메라를 챙겨왔지만 사진은 비가 와서 잘 찍지 못했고, 필리핀 생황이 조금 더 정리되면 사진슬라이드로 짭은 동영상이라도 제작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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